고린도전서 9장 16-23절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묵상해 볼 점]

1.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느 특정인만의 사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명이며, 우리 모두는 바울과 같이 "복음 전할 직분"을 맡은 자들입니다(17절, 롬15:16).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자랑이 될 수 없고(16절, 눅17:7-10),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는 값 없이 전해야 하며, 우리에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18절). 우리의 “권”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4-13절의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셨는데, 핵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내 권을 다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 것입니다(고전9:12-14).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이득을 바라거나 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14절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0장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2. 이처럼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권을 다 쓰지 않을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22절). 여러 모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에 있어서 자신의 선입관이나 편견 등과 같은 것들이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보다 자신의 고정관념이 더 앞서게 되면 분명 복음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예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일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것(고전15:10)은, 위의 18-23절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유자임에도 종과 같이 되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는... 이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모든 촛점을 복음에 맞추어서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사도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한 것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23절). 이토록 사도 바울이 복음에 참예하려고 하는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복음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여러 모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16-17절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결단과 적용]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여러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열심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는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까지 하셨는데, 이는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킬 정도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여러 선지자들에게 다양한 행동들을 시키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선지자들은 그 일이 부끄럽고 하기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순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20장 2-3절2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찌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찌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에스겔 4장 10-13절10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11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너는 그것을 보리 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찌니라 13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흩을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와 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호세아 1장 2절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 또한 죄가 없으셨음에도(요일3:15)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참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히12:2). 이처럼 앞서간 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본을 좇아서 이제 우리들도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양이 된다고 해서 아무런 제한없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 안에서 여러 모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18절-23절과 같은) 중심만 있다면, 진리의 성령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가 어떤 모양이 되어야 할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그 시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막13:10-11).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위치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여러 모양으로 예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에 있습니다(딤후2:15).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와 같이 예비되고 준비된 자를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후서 2장 20-21절20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아멘.